3文(もん)コラム by BON局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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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서 내려온 신 (Deus Ex Machina)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그리스 극장에는 ‘메카네(μηχανή)’라고 불리는 크레인형 무대 장치가 있었습니다.

배우를 매달아 허공에서 무대 위로 내려놓는 장치였습니다.

극이 도저히 풀리지 않는 매듭에 걸렸을 때, 이 기중기가 삐걱거리며 신을 내려보냈습니다.


신은 등장하자마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사라집니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기계로부터의 신(ἀπὸ μηχανῆς θεός)'이라 불렀고,

로마인들이 라틴어로 옮긴 말이 오늘 우리가 쓰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입니다.


후대의 평가는 박했습니다. 플라톤은 시인들은 궁지에 몰리면 기계를 들어 신을 매달아 올린다고 비꼬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사건의 해결은 사건 자체에서 나와야지 기계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 후 오랜 기간동안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게으른 작가의 변명, 이야기의 미숙함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인류가 불후의 명작으로 꼽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이 원리를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에서 생략되었지만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마지막 24권이 그렇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왕좌를 되찾은 뒤에도, 죽은 자들의 유족이 복수를 위해 몰려오면서 이타카는 다시 전쟁 직전으로 치닫습니다. 바로 그때 전쟁의 신, 아테나가 나타나 싸움을 멈추라고 명령하고, 양측은 이에 복종하면서 갑자기(?)평화가 찾아옵니다.


우리 나라 ‘심청전’도 다르지 않습니다. 심청은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이 팔려 인당수에 던져집니다. 인간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어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용왕’이 나타납니다. 용왕의 개입으로 심청은 수궁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연꽃에 실려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오며, 황후가 되어 맹인 잔치를 열고, 마침내 아버지의 눈까지 뜨는 놀라운 대 반전이 펼쳐지면서 마무리 됩니다.

이처럼 동서양 고전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정말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인류 최고의 고전, 성경은 오히려 이 구조로 가득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수백명과 맞섭니다. 그는 제단을 쌓고 도랑을 파고, 물통으로 물을 제물 위에 들이붓습니다. 이제 불이 붙을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아 버립니다.
신약에도 스승을 잃은 제자들이 정말 최악의 참담한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등지고 낙향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믿었는데..." 소망이 사라진 자들의 탄식입니다. 그 길 위에서 그들은 다시 살아나 갑자기 나타난 예수를 만납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리에 서서 그 죽음을 마땅히 여기던 사울은, 기세등등하게 다메섹으로 가던 길 위에서 갑자기 빛에 눌려 눈이 멀고 꿈에서도 상상 못 했던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는 이 사건 역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전형입니다.


그렇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것이 문학적 원시성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첫째, 주목해야 할 것은 신이 내려오는 '시점'입니다. 기계는 언제나 인간이 갈 수 있는 끝까지 간 다음에야 내려옵니다. 엘리야는 수백명의 거짓 선지자가 할 짓을 다 하는 것을 지켜 보고 더하여 도랑을 파고 물까지 들이 부은 뒤였습니다.
심청은 이미 인당수에 그 몸을 날린 뒤였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낙향 길에 있었고,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몫을 다 쏟아 붓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지점, 호라티우스가 말한 "그만한 구원자가 필요한 매듭"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개입합니다.


둘째, 이 장치가 수천 년을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J. R. R. 톨킨은 이 갑작스러운 반전을 '유카타스트로피(eucatastrophe)', 곧 '좋은 파국'이라 불렀습니다. 재앙이 끝나는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급전환입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복음서는 인류 역사에 실제로 일어난 유카타스트로피이며, 부활이야밀로 유카타스트로피의 정점이라고 말입니다.
옛사람들이 무대 위에 기중기를 세운 것은 상상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신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이미 그들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들었으며 또한 그들 자신이 삶의 과정을 통해 수없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오롯이 후대에 물려줄 형식으로 그것을 채택했다고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금 무언가가 무너진 자리에 서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작금에 처해있는 선교회의 현실이 풍전등화 같아 보일 수도 각자가 하고 있는 사업이든 건강에 관한 문제, 혹은 자녀 문제든...
이미 상황은 끝났고 더는 손쓸 방법이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할 일은 도랑을 파고 물을 붓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 왔던 이 길을 여전히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동서양의 옛이야기들과 성경이 한 목소리로 전했던 바 같이....
‘기계’가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강하게 역사 하실 하나님의 그 마지막 막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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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9/20